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가치

정부가 골목상권 살리기 정책의 일환으로 지난 2010년 도입한 동네슈퍼 나들가게가 최근 5년 새 1천곳 이상 폐업했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정부의 골목상권 지원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로 비춰진다. 나들가게 지원이 개점 초기에 집중된 반면 지속적인 사후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폐업률 증가의 단초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무너진 상도덕 때문이란 주장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룡자본을 앞세운 유통 대기업들의 골목 상권 진출이 그 만큼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 극대화에 있다. 창출된 이익을 재투자해 기업 성장의 디딤돌로 삼는 것은 영속적 기업으로 나아가는 표준 모델과도 같다. 어찌 보면 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선 당연한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업의 존재 이유를 무작정 이윤 창출 극대화에만 맞춰선 안 될 것이다. 이에 못잖게 사회적 책임 또한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이윤 극대화만 좇지 말고 나눔과 기여의 가치를 철저히 실현해야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달라는 요구는 우리사회에서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을 통해서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엔 크나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기업활동을 통해 창출된 이윤에 대한 사회 환원은 쥐꼬리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회 약자와의 상생(相生), 즉 동반 성장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많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잇따른 동네상권 진출은 물론 공룡자본을 앞세운 대형마트 입점이 활발하면서 전통시장 상권이 위축받고 있는 게 현주소다. 1970~80년대 그렇게 많던 동네 빵집이 최근들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일종의 자본주의 병폐로밖에 볼 수 없다.

듀 프로스트 하버드대 총장은 지난 2008년 하버드대 MBA설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의 세계경제 파탄은 개인의 탐욕과 물질적 보상 추구에서 나온 결과다. 경제위기의 책임은 윤리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다.” 도덕성 결여야말로 글로벌 경제위기를 자초한 근원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선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구의 윤리와 가치로는 분명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그 대안과 해답을 동방사상의 뿌리에서 찾으면 어떨까 한다. 기업경영에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도(道)가 있는데 이를 어기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선비다운 기업인인 조선시대 유상(儒商)이 품은 상도덕이다. 곧 철저한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원칙에 입각해서다.

우리 사회에선 최근들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 사회적 갈등이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 부의 편중이 가중된 탓이다. 지난 8월 기준 우리나라 400대 부자 1인당 평균 보유자산만 무려 4천590억 원에 달하고, 이중 자산이 1조원을 넘는 ‘슈퍼갑부’만 35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부자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모범적 실천가는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 나눔 실천으로 굶주린 제주도민을 구한 여성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시대 정신은 최근들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김만덕은 1794년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산 뒤 도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굶주림에서 아사자들을 구해 정조로부터 내의원에 속한 여의 가운데 으뜸인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받은 조선을 대표하는 나눔사랑 실천가다.

제주도는 그 정신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1990년 ‘김만덕상’을 제정해 해마다 국내외 여성을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으며, 기념관 건립사업도 속도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김만덕이 품은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현대로 따지자면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일 것이다. 그 것도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한 전 재산 환원을 통해서다. 이 참에 조선 거상 김만덕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그가 간직한 나눔 사랑 정신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인 모두가 본받는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소득 계층 간 갈등은 손쉽게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진구/ 경영저널 대표이사ㆍ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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